글 : 임용수 변호사
보험 가입자가 해약 환급금을 직접 청구하고 수령까지 한 후 장기간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면 해당 보험계약이 임의 해지 됐다고 봐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임용수 변호사(보험전문)가 판결 내용을 알리고 해설합니다.
황 판사는 판결문에서 「최 씨가 해약 환급금을 청구해 수령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여기에 최 씨가 보험료를 마지막으로 지급한 이후 상당한 기간이 경과해 해약 환급금을 청구한 점, 최 씨는 해약 환급금을 청구하면서 다른 여러 건의 해약 환급금을 같이 청구하기도 한 점, 최 씨가 해약 환급금을 수령하고 약 7년에서 13년 동안 아무런 이의 제기를 하지 않은 점 등을 종합해 보면, 최 씨의 보험계약이 임의 해지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설령 최 씨의 보험계약이 임의 해지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구 상법 제662조는 보험금액의 청구권은 2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시효가 완성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바, 최 씨가 교통사고를 당한 날로부터 2년이 경과한 날에서야 보험금 청구를 한 사실은 기록상 명백하므로, 최 씨의 보험금 청구권은 시효로 소멸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최 씨는 2012년 3월 김천시 지좌동 김천교 위에서 중앙선을 넘은 차량이 신호 대기 중인 최 씨 차량을 가격하는 1차 사고를 당했고, 2012년 7월 김천시 아포읍 봉산리 작동마을 앞 906번 지방도로에서 중앙선을 넘은 차량이 정상 진행 중이던 최 씨 차량을 가격하는 2차 사고를 당했습니다.
임용수 변호사의 케이스메모
[편집자 주] 이 판결 사안은 로피플닷컴 법률사무소(임용수 변호사)가 소송대리인으로 관여한 사건이 아님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알면 상식이 쌓이고 유익한 보험 이야기, 시작합니다.
보험 가입자가 해약 환급금을 수령하고 상당한 기간 동안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보험 가입자의 임의 해지가 있었다고 일률적으로 추정하거나 단정할 수 없습니다.
민법상 법리로는 그런 추정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상법 규정 및 보험 법리에 따를 경우 다소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흔히 저지르는 잘못 중의 하나가 사적 자치의 원칙이 적용되는 민법상의 법리로만 판단하려는 것입니다. 공공성·사회성을 지녀 상대적 강행법성을 띤 보험의 특성상 보험 가입자 보호를 위한 규정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규정입니다.
계속 보험료 납입 최고 및 해지 절차에 관한 상법 제650조 제2항은 보험계약자에게 보험료 미납 사실을 알려줘 이를 납부할 기회를 줌으로써 불측의 손해를 방지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보험계약자가 해약 환급금을 수령했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보험사가 보험계약자에게 보험료를 납부할 기회를 줬다거나 또는 미납 보험료를 납부해 보험을 살리거나 부활할 기회를 줬다고 넘겨짚어 판단할 수 없습니다. 보험계약자에게 발생할 수 있는 불측의 손해를 방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도 묵시적 임의 해지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런 판결을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보험사가 상법에서 규정한 보험료 납입 최고 및 해지 절차를 이행하려고 노력했다는 흔적이 엿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판결의 판시 이유에는 보험사가 보험계약자에게 미납 보험료의 지급을 최고했음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묵시적 합의 해지가 아니라 묵시적 임의 해지가 됐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냥 보험금 청구권의 소멸시효 완성을 이유로 해서만 기각 판결을 내렸으면 무난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 소멸시효 완성 판단만으로는 기각의 근거가 좀 부족했기 때문에 그런 판단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교통사고는 그 자체로 약관에서 정한 보험사고(보험금 지급 사유)가 아닙니다. 따라서 교통사고를 당한 날부터 보험금을 청구할 수 없고, 그 결과 교통사고를 당한 날부터 보험금 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진행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보험사고(보험금 지급 사유)는 교통사고가 아니라 약관상의 장해 상태가 됐거나 장해 진단이 있었을 때이고 그때부터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게 됩니다. 장해(진단)가 없거나 장해 상태가 될 것인지 여부도 불분명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교통사고 났으니 장해 보험금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는 취지로 판시하는 것은 판단 미스입니다.
보험사 입장에서는 장해도 없는 사람이 교통사고가 발생했으니 장해 보험금을 달라고 청구하면 속으로 웃습니다. 약관도 안 보느냐고 하며 핀잔을 주겠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일부 판례가 흔히 저지르는 잘못 중 하나는 보험법(상법 보험편)과 보험법리를 적용해야 하는 사건에 민법이나 민법상의 법리를 적용해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보험법에 관한 전문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민법상 불법행위 책임을 묻는 자동차보험(대인배상, 대물배상 등)은 교통사고라는 불법행위가 발생한 날부터 청구권 소멸시효가 진행되지만, 보험법이 적용되는 인보험(생명보험, 상해보험 등)은 약관에서 규정한 보험사고(이 판결에서는 '장해')가 발생한 날부터 청구권 소멸시효가 진행됩니다.
다만, 결론적으로 볼 때는 보험 가입자에게 큰 잘못이 있습니다. 약 7년에서 13년 동안 보험료 납입을 하지 않는 등 자신의 주된 의무는 이행하지 않으면서 보험금만 달라는 것은 권리남용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판례 중에는 일부 보험금에 관한 약정 지급 사유가 발생한 이후에 해당 보험계약이 해지, 실효됐다는 보험사 직원의 말만을 믿고 당시 경제적 필요에 조금이라도 충당하고자 보험 가입자가 대리인을 통해 해지 환급금을 수령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해지 사유가 없었던 이상 이를 곧 해당 보험계약을 해지하기로 하는 의사로써 한 행위라고 할 수는 없다고 판시한 사례가 있습니다.
또 보험대리점이 미납 보험료 지급에 관한 보험사의 적법한 최고 절차가 없었음에도 보험계약이 실효됐다고 단정한 나머지 보험계약자에게 일방적으로 이를 고지하면서 부활을 논의함으로써 보험계약자도 보험계약이 실효된 것으로 오인했다고 하더라도, 보험사가 적법한 최고 절차를 거치지 않은 이상 보험계약이 해지되거나 실효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취지로 판시한 사례가 있습니다.
최근의 판결 중에도 보험사가 해지 통지를 했음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면, 보험 가입자가 연체된 보험료를 납입하고 부활 청약서에 '부활하고자 했으나 개인 사정으로 지체돼서 못 감' 등과 같은 내용을 작성한 뒤 서명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정만으로 보험 가입자가 보험계약이 해지됐음을 수긍하고 이를 전제로 새로이 부활계약을 체결할 의사를 표시했다고 보기 어렵고, 따라서 보험계약이 적법하게 해지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한 사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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