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농사 |
글 : 임용수 변호사
고추 농사를 짓는 비닐하우스 수선 작업은 농작업이므로 하우스 안에서 고무바를 수선하던 중 고무바가 끊어지며 머리 뒷부분을 세게 때려 사망했다면 보험사는 농작업 중 재해 보험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원래 지급해야 할 5000만 원의 무려 10분의 1 수준인 500만 원의 보험금만을 일방적으로 지급한 농협생명의 조치가 옳지 않다는 취지입니다. 임용수 변호사(보험전문)가 판결 내용을 알려드리고 해설합니다.
신 모 씨는 지난 2008년 수원에 있는 농업대학을 졸업한 이후 농사나 건설업체 일용직 현장 근로자 일을 했습니다. 평소 보험의 필요성을 느낀 신 씨는 2011년 5월 농협생명의 한 공제보험 상품에 가입했습니다. 이 보험 약관에는 일반 사망보험금을 '유족위로금'이라는 이름의 특약으로 설정했고, 보험금 지급 사유는 '농작업 중 재해로 사망 시' 5000만 원을, '농작업 중 재해 이외의 재해로 사망 시' 500만 원을 각각 지급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신 씨는 농협생명의 보험 상품을 1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유지하던 중 지난 2012년 4월 낮에 고추 농사를 짓던 비닐하우스에 들러 하우스 내 고무바를 수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고무바가 끊어지면서 신 씨의 머리 뒷부분을 강타했고, 잠시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머리에 혹이 조금 나왔지만 신 씨는 별다른 조치 없이 귀가했고, 이후 자택에서 잠을 자다가 새벽에 호흡 이상 및 의식 소실 상태로 어머니에게 발견됐습니다.
신 씨의 어머니는 즉시 119 구급차를 불렀고, 새벽 3시 30분경 신씨는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이송됐습니다. 응급실에 실려 간 신 씨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당시 신 씨는 왼쪽 측두골의 폐쇄성 골절과 머리 내 열린 상처가 없는 경막위 출혈이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고, 더 큰 병원으로 옮겨져 두개 감압 개두술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 씨는 끝내 숨졌습니다.
그 후 신 씨의 유족(자녀)은 신 씨의 사망이 농작업 중 재해로 사망한 경우라며 농협생명에게 보험금 5000만 원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농협생명은 신 씨의 사망이 농작업 중 재해로 사망한 경우가 아니라고 판단, 농작업 중 재해 외의 재해로 사망했을 경우에 해당하는 500만 원의 유족위로금만을 지급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통지했습니다. 강력 반발한 유족은 소송을 냈습니다.
고무바에 의한 후부두 강타 |
서울서부지법 민사2부(재판장 김승정 부장판사)는 신 씨의 유족이 농협생명을 상대로 낸 보험금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농협생명의 항소를 기각하고 "농협생명은 유족에게 4500만 원을 지급하라"고 원고승소 판결한 1심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1)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농협생명은 신 씨가 비닐하우스 보수 작업을 하다가 사망에 이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사고 무렵 신 씨의 나이는 만 29세에 불과했고, 당시 그는 농사일을 하거나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근로를 하면서 부모 및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며 「신 씨가 그의 어머니에게 의식 불명 상태로 발견되기 전까지 그에게 별다른 기왕증이 있었다거나, 그가 농작업 외에 다른 원인으로 머리에 골절 및 출혈이 발생할 정도의 외상을 입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자료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오히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신청한 사실조회 회신 결과에 의하면, 신 씨는 사고 이전에 머리의 외상이나 뇌출혈 등과 관련된 진료를 받은 내역이 전혀 없었고, 또 사고로 2012년 4월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직후 '뇌압 조절 실패 시 사망 가능성 높음'이라는 진단을 받았으며, 결국 2014년 3월 뇌출혈 후유증, 기타 마비성 증상이 원인이 된 악액질을 직접 사인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 사실이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신 씨는 사고 당일 비닐하우스의 고무바를 수선하는 보수 작업을 하다가 머리를 다쳐 사망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또 사건의 최대 쟁점이었던 사고 당시 비닐하우스의 고무바를 수선하는 보수 작업이 보험금 지급 사유 즉 '농업을 목적으로 하는 작업으로서 농작물 재배 시설의 신축, 증·개축 등의 작업'에 포함되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명쾌한 해석을 내렸습니다.
재판부는 「고추 재배를 하는 비닐하우스를 수선하던 신 씨의 작업이 농업을 목적으로 하는 작업이고, 농작물 재배 시설과 농작물 보관 창고 및 축사의 신축, 증·개축 등에 해당하는 경우」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비닐하우스는 농작물 재배 시설이고, 보험 약관상 '신축 및 증·개축 등'이라고 규정해 농작물 재배 시설의 신축이나 증축, 개축에 작업을 한정하지 않고 있으며, 비닐하우스의 수선은 비닐하우스가 본래의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돕는 작업으로서 이를 '신축, 증·개축 등'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봐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 고 밝혔습니다.
특히 「농협생명은 약관에서 농작업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를 별도로 규정하고 있는데, 농작물 재배시설을 수선하는 작업은 농작업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별도로 정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정」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재판부는 「앞서 본 여러 사정들을 종합해 보면, 비닐하우스의 보수 작업도 약관에서 정한 농작업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임용수 변호사의 케이스메모
이 판결의 경우, 비닐하우스 보수 작업이 농작업에 해당하는지 여부보다는 과연 실제로 그런 작업을 하다가 재해 사고(고무바에 후두부 강타)가 발생했는지가 관건이었던 사례로 보입니다.
1심 판결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농협생명의 주장이 정리돼 있었으나 판단을 생략한 것으로 보이고, 항소심 판결의 경우에는 이 부분에 대한 주장을 인용만 하면서 구급 활동 일지, 대학병원의 의무기록, 피보험자 측의 진술이나 증언 등을 토대로 신 씨가 사고 당시 비닐하우스의 고무바를 수선하는 보수 작업을 하다가 머리를 다쳤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농작업 중 재해'와 관련된 판결들 중에 눈에 띄는 사례들이 몇몇 있습니다. 사례 중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경운기 뒷바퀴에 돌을 받쳐 주고 그래도 경운기가 뒤로 밀리자 이를 세우기 위해 핸들을 잡는 과정에서 넘어져 경운기 앞바퀴에 가슴 부위가 눌려 사망한 사고에 대해 농기계의 이동(농기계에 편승)을 했다거나 농기계를 이용한 실제 운반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농작업 중 재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한 것이 있습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화물차를 운전해 구판장 앞 도로를 지나다가 도로를 이탈하면서 산언덕을 들이받고 차량이 전도되는 사고로 사망한 피보험자가 사고 당시 볏짚 운반 작업을 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약관에서 정한 농작업 중 재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한 사례도 있습니다.
또한, 공판장에서 마늘을 출하한 뒤 경운기의 적재함에 하얀 비닐 포대를 싣고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다면, 이때의 경운기 운전 행위는 농용 자재 직접 운반 작업 즉 농작업 중 재해가 아니라고 판시한 사례가 있습니다. 각각의 사안마다 사건 내용이 다소간 다르지만, 대략적으로 볼 때 '농작업 중 재해'를 인정한 판결들보다는 이를 부정한 판결들이 상대적으로 조금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