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임용수 변호사
야산에서 풀베기 작업을 하는 인부들을 감독하던 중 갑자기 달려든 벌떼에 전신을 쏘인 뒤 여러 번 고통을 호소하다가 1시간만에 정신을 잃고 사망했다면, 보험사는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벌에 쏘인 뒤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사망했고, 그 시간적 간격이 1시간여 밖에 되지 않으며, 그 사이에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할 만한 다른 외력이 가해졌다거나 혹은 평소 환자에게 갑작스러운 사망을 불러올 수 있는 치명적인 질병이 있었다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면 우발적인 외래의 사고 즉 재해로 봐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임용수 변호사(보험 전문변호사)가 판결 소식을 전해 드리고, 진진한 해설과 법률 조언(CaseMemo)을 덧붙입니다
박 모 씨는 최 모 씨 소유의 강원 평창군 진부면의 한 야산에서 풀베기 작업을 하며 다른 인부들의 작업을 감독하게 됐는데, 오전 8시 30분쯤 직접 풀을 베는 다른 작업 인부의 뒤를 따르다 갑자기 달려든 벌떼에 전신을 쏘이게 됐습니다.
박 씨는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오겠다며 혼자 산을 내려갔고, 그 무렵 최 씨가 작업 인부들에게 줄 새참을 가지고 작업 현장 쪽으로 오다가 작업 현장 아래의 농로에서 박 씨가 가슴을 움켜진 채로 '숨쉬기가 어렵고 가슴이 아프다'고 호소하면서 차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차량에 박 씨를 태우고 급히 진부에 있는 병원으로 갔습니다.
박 씨는 최 씨가 운전하는 차량 조수석에 타고는 병원으로 가는 도중 여러 번 고통을 호소하다 몸이 늘어지면서 정신을 잃었고, 약 20분 걸려서 오전 9시 40분쯤 진부병원에 도착했지만 의사는 박 씨가 사망했다고 진단했습니다.
최초로 박 씨의 사망을 확인한 의사는 박 씨의 선행 사인을 급성 심근경색, 직접 사인을 급성 호흡부전으로 추정했으나, 선행 사인을 급성 심근경색으로 추정한 이유는 일상적으로 비만인 사람들에게는 급성 심근경색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막연한 이유에서였고 달리 박 씨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고 볼 만한 자료는 없는 상태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박 씨의 사망을 확인한 의사는 박 씨의 사망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으로 진단하면서 다만 사체의 좌측 하지에 벌에 물려 생긴 부종이 있다는 것만 확인했습니다.
경찰의 수사 결과 박 씨가 사망 당시 입고 있던 옷의 호주머니에서 호흡기 질환에 사용하는 흡입식 치료 약품이 발견된 것 외에는 달리 타살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따로 부검 절차를 거치지 않고 경찰은 수사를 종결했습니다.
재판부는 「박 씨가 벌에 쏘인 후 병원으로 가던 도중 사망했고, 그 시간적 간격이 1시간밖에 되지 않으며, 그 사이 박 씨를 사망에 이르게 할 만한 다른 외력이 가해졌다거나 혹은 평소 박 씨에게 갑작스러운 사망을 불러올 수 있는 치명적 질병이 있었다는 아무런 흔적이 없는 이상 박 씨는 벌에 쏘인 것이 원인이 돼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사고의 경위 등에 비춰 볼 때 박 씨가 벌의 독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는 등 특이 체질자였을 가능성이 높고, 또한 지병인 만성기관지염이 박 씨의 사망이라는 결과 발생에 기여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시 박 씨의 사망은 약관 재해분류표의 분류 항목 중의 '자연 및 환경요인에 의한 불의의 사고'에 해당하는 재해로 인한 사망이라고 볼 수밖에는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또 「약관의 재해분류표에 의하면 '질병 또는 체질적 요인이 있는 자로서 경미한 외부 요인에 의해 발병하거나 또는 그 증상이 더욱 악화됐을 때는 그 경미한 외부 요인은 우발적인 외래의 사고로 보지 않음'이라고 돼 있는데, 이는 결국 그 사고가 우발성과 외래성을 결여했다고 보여지는 경우를 일컫고 있는 것으로서 이미 질병 또는 체질적 요인이 있는 경우에 어떠한 외부적 자극에 의해 사고가 발생했으나 그와 같은 외부적 자극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기왕의 질병 또는 체질적 요인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근접한 시기에 동일한 결과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이는 경우에는 이는 결국 우발성과 외래성을 결여한 것이므로 이를 재해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취지라고 새겨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박 씨에게 벌의 독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었다거나 혹은 만성기관지염이 있어 그 기왕증이 박 씨의 사망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박 씨가 벌에게 쏘이는 일이 없이도 그 같은 특이 체질 혹은 기왕증으로 인해 어차피 장차 근접한 시기에 필연적으로 사망할 수밖에는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결국 한화생명은 유족들에게 재해사망보험금 등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습니다.
임용수 변호사의 케이스메모
최초로 벌에 쏘이게 되면 피부에 염증이 생겨 그 부분이 빨갛게 부어오르게 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잠시 붓고 열이 나다가 자연치유되며 다음번 공격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항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후 다시 벌에 쏘였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문제가 없지만, 벌독과 같이 특정 물질에 민감한 사람들(알레르기 과민반응자)은 특정 물질이 몸에 들어오게 되면 히스타민이 과다 분비되고, 혈액이 혈관 속을 빠져나와 몸이 붓고 혈압이 떨어지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부작용이 심한 경우는 기도가 많이 붓게 되면서 기관지가 수축돼 숨이 막히게 됩니다. 이에 따라 호흡곤란 증세가 발생하며 즉시 치료가 이뤄지면 별다른 문제없이 회복되지만, 진단과 치료가 늦어지면 치명적 결과로 쇼크사(Anaphylactic shock, 아나필락시스 쇼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벌독 등의 원인 물질에 노출될 경우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과민한 알레르기 반응을 '아나필락시스 반응(Anaphylaxis reactions)'이라고 하는데, 벌독의 독성이 강해서 증상이 심하게 나타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인체의 면역 체계가 벌독에 대해 지나치게 과민 반응하기 때문에 아나필락시스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판결에서 가정적인 판단은 이 같은 아나필락시스 등의 질병 또는 체질적 요인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박 씨에게 질병 또는 체질적 요인이 있었더라도 가장 근접하고 중요한 사망원인은 '벌떼에 쏘인 것'이라는 외부 요인에 있는 것이고, 벌떼에 쏘이고 1시간여만에 사망한 경우 '벌떼에 쏘인 것'을 경미한 외부적 요인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타당한 판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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